듣던 중 반가운 소리: 서울시 창경궁~종묘 녹지구간 복원

이게 무슨 뒷북인지 모르겠다. 벌써 이 내용으로 기사화된지가 한참이 지났는데.
그래도 한 때는 건축쟁이였던, 그리고 종묘를 좋아하는 맘에 몇자..

서울시 창경궁~종묘 녹지구간 복원
창경궁-종묘 녹지구간 복원된다
창경궁∼종묘간 녹지연결에 따른 고궁복원

흔히들 종묘사직이란 말을 쓰는데(사극보면 늘 대신들이 이걸 지키라고 길길이 날뛰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서 종묘 [각주:1]는 역대 선왕과 왕비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사직은 토지의 神인 사(社)와 곡식의 神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서 백성들의 복을 위하여 社稷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뜻한다. 그리고 이 둘을 나라의 근간으로 여길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일제 시대 온 동네 산이면 산마다 말뚝을 박으러 다니던 무리들이 여길 가만 내버려둘리가 없다. 1927년  창경궁과는 담으로만 구분되어 있던 종묘를 그 사이에 현재의 율곡로를 설치함으로써 맥을 끊었다.
1927년....그게 언제인가? 벌써 80년이 넘었다. 그 동안 그렇게 끊어진 채 내버려 둔 우리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http://happydrug.tistory.com/122 사진 너무 잘 찍으셨다. 어떻게 보면 죽은 자를 위한 공간. 약간의 답답함. 숨막힘도 느껴지지만 막상 가보면 푸근하다.


촌놈이 처음 서울올라가서 신기한게 한둘이겠냐만은 종종 종묘를 들러 창경궁을 지나 대학로 방면으로 나가는 길이 참 신기했다. 매번 지하철 타고 땅 밑으로만 다녀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그 길은 그저 걷고 싶을 때면 발걸음이 향하는 그런 곳.
거칠게 다듬어진 판석들 가운데 검은색 길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마치 그 옛날의 제례가 그저 그런 과거가 아닌 것 같은 기분도 느끼고, 때론 구석에 앉아 느릿느릿 걸어가시는 노인분들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기도 했었다.(물론 젊은 층은 출사 나온 친구들 아니면 보기 힘들다. 요즘 종묘로 데이트하러 가자면 먹힐려나 모르겠네 ㅡㅡ;;)


뿐 만 아니라 건축과 수업에서도 종종 다뤄지던 사이트가 이 곳이었다. 단절된 두 영역을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머 이런 거였는데, 그 당시엔 참 생각이 좁았었다.ㅋㅋ 물론 지금 서울시가 하려는 형태의 복원안은 예전부터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의 머리속에 있던 내용이다. 난 그 때 건성건성 지금의 육교를 아주 조금 넓혀서는 양쪽에 나무를 식재하는 정도...결국 담당교수에게 욕먹었다. 스케일이 그렇게 작아서 어디다 써먹냐고..ㅡㅡ;; 그래서 다음 시간엔 잔뜩 힘주고 폭 100m짜리 다리를 놓는 것으로 모형을 만들어 갔더니...이런~~~ 옆 친구녀석이 터널을 내고 사이트 전체를 돋우어서 연결되 하나의 공원으로 만들어 온거다...ㅡ,.ㅡ'' 아라따고..나 속 좁다고..알아서 반성했다.ㅋㅋ

그런데 당시에 내 눈을 끌었던 계획안은 그게 아니었다. 타과에서 전과를 해온 낯설은 친구가 생뚱맞은 계획안을 내놓았는데 그게 맘에 확 와닿았다. (아니, 닿았었다. 그땐 ㅡㅡ 머 지금은 꼭 그런 견해를 가진 건 아니어서)
기존의 육교 중간을 들어내고 투명한 소재로 대체한 모형이었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건축은 말빨에서 90%는 먹고 들어가는 판이라..그 친구의 썰은 이랬다.

과거..라는게 하나하나의 켜처럼 쌓여져 만들어지는 것인데, 지금의 단절된 창경궁과 종묘 역시 그러한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래서 전체적으로 원형을 복원하지만 현재의 육교를 그저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고, 가운데 투명하게 만들어진 구간을 통해 단절되었던 과거에 대해 외부에서 인지할 수 있도록....어쩌고 저쩌고..머 이런 내용이었는데,
그 친구덕에 군대 다녀와서도 정신 못차리고 헬렐레 하던 내가 자극 좀 받았더랬다.

그랬던 종묘인데, 이제 복원되고 나면 싸늘한 율곡로변 돌담길도 걸을 일 없겠구만. (여긴 이상하게 갈 때마다 음침하더라는. 이 부근에서 길 헤매다 입사원서를 제출하지 못한 아픈 기억이 있어서인지..ㅋㅋ)
복원공사 시작전에 조만간 종묘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1.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李垠)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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