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노희경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간헐적으로 본 그의 드라마가 있긴 하지만 그리 맘을 뺏겨 몰두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어디선가 얼핏 어머니에 대한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의 미니홈피에 스크랩된 글이었던 듯 지금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었다.
부모도 자식의 한이 되더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나는 그녀가 내 한이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시절, 분명 나는 그녀의 한이었을 것이다.
내 어머니는 순하디 순한 분이셨다.
그 순함이 정도를 지나쳐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그녀를 봤다면
조금 모자란다 하였을 것이다.
그녀는 젊어서는 자식들 잡기를 쥐잡듯하여 제 성질을 못 이기더니,
오십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희한하게도 갑작스레 흰머리가 늘고
주름이 지는 상늙은이가 되더니만, 싫고 좋고도 없는 마냥 무골인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변화를 두고 자식들은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극악한 삶의 고통이 그녀를 지치게 하지 않았겠느냐
그리 맺었다.
오십에 그렇게 기운이 쇠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후 누가 막말을 해도 성을 안 내고,
누가 옆에서 까무러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더니
오십 중반에 덜컥 암에 걸렸다.
그리곤 별로 내색도 않더니만
1년 반의 짧은 투병 기간에도 자식들이 헉헉대자,
삼일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날 좋은 날 가볍게 눈을 감았다.
나는 지금도 임종 때의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는 편하게 웃지도, 고통스럽게 보채지도 않고
아주 건조하게 돌아가셨다.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간지 이제 5년.
우리의 이별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그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모든 의식이 어서 끝나고 잠이나 실컷 잤으면, 잠이나 실컷 잤으면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죽은 자를 사랑하지 마라. 죽은 자 맘 아퍼 이승 문턱 못 넘을라.'
내가 매일 어머니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는 걸 알고 한 스님이
내게 이런 식으로 충고하셨다. 그 충고에 나는 옳다커니 싶었다.
그래, 가지 마라. 어머니 저승에 가지 마라.
넋이라도 이승에 남아 나랑 먹고 놀자. 나랑 먹고 놀자.
누구는 내 말이 말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제 어미 죽는 날 그리 잠만 밝혔다며, 사랑한다는 건 뭐고,
저승까지 가지 말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렇다. 이건 분명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랬다.
나는 술도 안 마시면서 곧잘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 버릇은 더욱 중증이 되었다.
내 지기들은 모두 열댓 번씩 들은 말을 나는 지금 또 하려 한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한 열흘 남짓 전의 일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일찍 퇴근해 어머니와 아버지, 그
리고 지금은 우리 집의 수양딸이 된 고아 친구 향이와
성남문화회관에서 하는 공옥진 여사 공연을 보러 갔었다.
어머니 생전에 처음하는 공연 구경이었고
(참말이다. 물론 동네 약장수 구경은 한 적이 있었지만,
일금 만 원짜리 공연 구경은 처음이었다), 내 생전에
어머니와 같이 본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다.
우리는 그 공연을 참 즐겁게 봤다.
분수에 안 맞게 택시를 타고, 분수에 안 맞게 공연 도중 걷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만 원씩이나 내면서, 분수에 안 맞게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그때가 기억난다.
나는 그냥 웃는데, 내 어머니 구경하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들 웃는 대목에서 괜스레
눈이 붉어지며 박수를 치는데, 그 소리가 정말 우렁찼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그래도 내가 참 효녀짓을 했구나 싶었다.
우리는 공연 구경을 다 하고, 오천 원이나 하는
공옥진 목각을 사고 일식집으로 갔다.
부모님을 대접하는 첫 자리였다.
참, 일식집에 가기 전, 내 호의가 과했는지
아버지는 한사코 집에서 밥 먹지 돈 주고 밥을 왜 사먹느냐 했고,
어머니는 우리 막내딸이 뭘 사줄까 보자며 선뜻 가자 했다.
속없는 어머니. 사실, 그즈음 내 주머니는 허당이었다.
그러나 한번 한 말을 도로 담아 넣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일식집 문을 너무도 당당하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주문을 했는데, 알탕에 생선초밥, 그게 전부였다.
음식이 나오고, 빈약한 상차림에 스스로가 멋쩍어
나는 서둘러 먹자 하고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한참을 아버지와 나, 그리고 향이가 수저질을 하는데도
어머니는 도통 가만이만 계셨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시나 싶었다. 다른 걸 시켜 드릴까 싶었다.
상차림이 민망해 어머니 얼굴을 못 보고, 나는 그리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 얼굴을 봤는데 그 눈을 봤는데
눈물이 그렁해 울고 계셨다.
눈물이 날 만큼 좋으셨던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사랑 받아나 봤겠니.'
내 어머니는 그렇게 싸구려 효도에도 감동하는 그런분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두고두고 못 잊는다.
내 얼마나 그녀 알기를 소홀히 했던가.
참 묘하다. 살아서는 어머니가 그냥 어머니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녀 없이 세상이 살아지니 참 묘하다.
..............
...... 내가 그녀의 못난 한이었듯,
그녀 역시 이제 와 내겐 다 못한 사랑의 한이 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바란다.
내세에 다시 그녀를 만난다면, 다시 그녀의 막내딸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걸,
목숨처럼 사랑했다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초상을 치르면서는 잠만 잤어도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녀로 인해 울음 운다는 걸 그녀는 알까.
제발 몰라라. 제발 몰라라.
...........
1997 년 3월 노희경
읽은 그의 에세이가 맘에 들어 노희경, 노희경....누구지? ...하며 몇번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마침 그의 글이 묶여져 책으로 나온다기에 주문하고는 설레어하며 기다렸다. 어제의 과음으로 하루종일 방바닥을 업고 있다가, 해질 무렵에야 일어나 어제 도착한 책을 들었다.
'말도 안되고 문장도 안 되고 더더욱이나 생각의 깊이란 게 너무도 보잘것 없는' 이라고 밝힌 서문과 달리 사랑에 대한, 그리고 비루했던 젊음에 대한 그의 생각들에 때론 공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그건 그렇지 않기도 한대...하며 읽었다.
늘 커다란 짐만 같은 삶, 청춘, 사랑 따위의 것에 대해 나보다 먼저 걸어간 이의 충고같기도 하고, 여전히 완성이 아닌 과정에 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동료의식 마저 느꼈다면 나의 과잉일까.
뼈아픈 후회_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람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 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니었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