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흔히 말하는 일상.




‘우연’, ‘뜻밖에’라는 단어가 어울리겠다.
출장길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맥도널드에서 라바짜 커피와 빵부스러기 몇 개를 사고는,
윗층 영풍문고를 잠깐 들렀다.
열차안에서 읽을 책을 생각하던 중 요즘 들어 독서에 편식이 심해진 듯 했다.
그래서 카버의 ‘대성당’을 만났다.
 
그 어떤 정보도 없이 만난 단편들은 조금은 생경하고, 한편으론 배려없음이랄까.
 
바짝 말라버린 바게뜨빵처럼 입안에서 푸석대었다.
곳곳에 등장하는 알코올중독과 전혀 이상적이지 않은(그러나 현실적인) 부부들.
누군가가 누구에게 의존적이면서도, 상대방 역시 벗어버릴 수 없는 일상들.
 
너무나 쉽게 읽어버리기엔 가슴 안쪽에서 먼가 울컥하는 것들.
그럼에도 쉴새없이 넘어가는 페이지, 난 그 한장 한장의 페이지에 마치 베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성당’이라는 단편집에서 가장 좋았던 단편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었다.
 
그 속에서 난 조금이나마 쉬어갈 수 있었다.
그 빵집 주인이 내민 별 것 아닌 빵이 내게도 도움이 되었다.
 
아주 작은 것에도 순식간에 무너져내리는, 계속 반복될 것 같지만 모두에게 유한한 삶의 모습.
 
, 그러한 상처가 전혀 관계없는 타인이 내민 의자에 앉으면서 기댈 곳을 얻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다.
 
마치, 추운 겨울 하얀 빵가루 가득한 빵집 안으로 들어서면,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부부와 앞치마를 두른 고지식한 표정의 빵집 주인이 보일 것만 같다. 물론 대성당 역시 좋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지막 장면은 언젠가는, 누군가와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
 

사실 여기까지가 처음 생각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rimm샘과 얘기를 하다보니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구글링도 좀하고, 여차저차 기록을 좀 남겨둘 셈이다.


+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은 글쓰기의 유일한 도덕이다. - 에즈라 파운드' 물론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 한 작가가 '진술의 기본적인 정확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적어도 길은 제대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

작가에게는 트릭이나 교묘한 잔머리가 필요없다. 물론 작가가 반드시 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작가라면 다소 멍청하게 보일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가끔은 절대적이면서도 소박한 경이로움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쩍 벌리고 이런저런 사물 - 일출도 좋고, 낡은 구두 한 짝도 좋다 -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

단편에 대한 카버의 이런 생각은 얼마전에 읽었던 포스팅을 떠올렸다.
 
물론 그 포스팅은 카버가 아닌 치버에 대한 얘기였지만, 콕 하고 맘에 들었다.

로쟈의 저공비행 블로그에서 카버 다음엔 치버라는 포스팅에 나온 내용 중 일부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나는 가끔 한국의 소설가들이 단편을 너무 ‘열심히’ 쓴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뛰어난 단편은 어쩐지 아주 경쾌하게 ‘대충’ 쓴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단편소설이 더 사소하고 더 건조하고 더 사악해졌으면 좋겠다.
좀 거창하고 좀 눅눅하고 좀 착하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단편이라면, 크고 둔한 톱으로 슬근슬근 톱질할 것이 아니라
잘 갈아진 작은 칼로 날카롭게 한 번 긋고 가야 한다. "


음..맞어 좀 사악해졌으면 좋겠어..ㅡㅡ;;

……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 글을 보면서 글쓰기라는 작업이 얼마나 치열함을 요구하는 것인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무수히 많은 단어의 바다에서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가야 할 명확하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나지 않지만 위 글에서 인용되었던 어떤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쓴 후,
모든 구두점을 지우고, 다시 하나씩 있어야 할 자리에 채워 넣을 때야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니 이외수 선생님의 말처럼 개나 소나 나서서 ‘나도 글이나 좀 써볼까’ 할일이 아닌게다

 +


대성당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레이먼드 카버 (문학동네, 2007년)
상세보기
디 아워스
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2 / 영국, 미국)
출연 메릴 스트립, 줄리안 무어, 니콜 키드먼, 에드 해리스
상세보기
+

근데 난 왜 카버의 단편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디 아워스'가 생각날까..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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