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은 죽일 수 없다” 토마스 상카라

“사상은 죽일 수 없다”
토마스 상카라, 그리고 세계 혁명의 계승자들
 
 
2007/1/22
최재훈 경계를 넘어
지난 연말 무렵, 밴쿠버 반전운동조직 MAWO에서 이를테면 이데올로그 역할을 하는 아이반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그 날 아이반이 다큐멘터리 한 편을 최근 구했다길래 다들 거실에 둘러앉아서 봤는데, 그 나라도, 그 혁명가의 이름도 생전 처음 듣는데다가 다큐멘터리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레이션과 자료사진, 약간의 인터뷰만으로 구성이 돼서 솔직히 좀 지루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한 느낌이었는지, 20여 분 밖에 안되는 영화상영이 끝나자마자 다들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가 출출한 배를 채우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버리고, 난 그냥 거실에 앉아서 다큐멘터리 속 인물에 관한 팜플렛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때 아이반이 다가오더니 "재훈, 토마스 상카라란 이름 이전에 들어봤어?" "아니, 처음 들어봐. 부르키나 파소란 나라도 이름만 들어봤지 전혀 알지 못하구." "그럼 이 팜플렛 빌려줄테니 읽어 봐. 그 사람이 한 연설문을 모은 건데, 이론적으로 논리정연하진 않지만 그 사람의 열정이 느껴질 거야."

토마스 상카라(Thomas Sankara)

아프리카 서부 내륙에 위치한 어퍼 볼타(Upper Volta, 지금의 부르키나 파소)에서 가톨릭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친 19살에 군대에 들어가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74년에 이웃 국가인 말리와의 전쟁에도 참전한 후, 20대 중반에 이미 훈련소 사령관에 임명될 정도로 잘나가는 청년장교였던 그는 수도 오아가두구(Ouagadougou)에서 알아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로도 이름을 떨쳤고, 오토바이를 즐겨탔던 낭만적인 청년이기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생활과는 달리 그는 이미 그때 어퍼 볼타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빈부격차, 남성들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여성들의 현실, 날로 황폐해져가는 자연환경 등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법적으로는 독립되었지만 여전히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착취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프리카의 현실을 가슴아파한 그는 군대 내에 '공산주의 장교 그룹'이란 비밀 조직을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그런 사상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부정권의 신임을 받던 그는 1981년 9월에는 정보장관으로까지 승진했지만 몇달 지나지 않아 군부정권의 반노동자 정책에 반발해 "민중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자들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임했다.

그러나, 관운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던지 그 해 11월에 일어난 또다른 군사쿠데타 이후에 그는 다시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대신 관운줄은 지지리도 짧아서 또 금방 군부정권에 의해 가택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83년 8월 4일, 그의 가택연금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고 리비아의 지원을 받은 그는 쿠데타에 성공해 군부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가 불과 33살. 그는 혁명 직후 행한 방송연설에서 8월 혁명의 성격을 '민주적 대중'혁명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혁명의 성격 규정은 이후의 혁명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게 된다.

즉, 관료들의 부패 청산,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된 국토의 재녹화사업, 일부다처제와 여성 할례의 금지 등을 통한 여성평등의 제도화, 빈민들을 위한 교육과 의료혜택 확대, 소수 기업가들이 독점하던 부의 재분배 등의 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스스로 (아이반이 빌려준 팜플렛의 제목처럼) "우리는 세계 혁명의 계승자들"이란 뚜렷한 세계 혁명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관점 하에서 쿠바와 연대했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략을 누구보다 앞장서 비난했으며,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혁명운동과 그 지도자 다니엘 오르테가(최근 재집권에 성공한 현 대통령)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다녔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웠다.

1984년 10월 39차 유엔 총회에서 그가 행한 연설을 보면 그의 혁명가로서의 열정과 신념은 비단 부르키나 파소(혁명 이후 그가 바꾼 국가명이 바로 부르키나 파소다)에 머무르지 않고 전세계 차원에서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기초한 실천을 해나간 인물이었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인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부르키나 파소의 대통령이었던 그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도 대단했었다고 한다. 그에 부응해 그는 항상 간결하면서도 확신에 찬 연설로 자신의 혁명관을 당당히 밝히는 지도자였고, 지금에야 안 사실이지만 불과 몇년 사이에 제3세계 혁명운동에서는 상당히 상징적이자 지도적인 인물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그의 혁명가로서의 존재가 인간으로서의 죽음을 재촉하고야 말았다. 1987년 8월 15일, 미국의 CIA가 사주하고 계획한 반혁명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예전 자신의 동지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는 암살당하기 일주일 전, 체 게바라 사망 20주년을 추모하는 군중집회에서 피델 카스트로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며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

그가 남긴 그 말처럼 인간 토마스 상카라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스러져갔지만, 그가 남긴 신념과 용기는 아직까지 많은 아프리카인들의, 아니 아직도 혁명이란 단어를 잊지 않고 있는 세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있으리라...

최재훈 경계를넘어 활동가


2007년 1월 22일 오전 9시 59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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