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던 시절 땅을 일구어 입에 풀칠이나 하던 때였다.
자꾸만 늘어나는 식솔들을 감당치 못하던 형과 대를 이을 자식이 없던 동생네가 있었다.
여러가지 이유들로 형네 조카 한명을 동생이 아들로 받아들였다.
그 때 이미 그 아이는 머리가 굵었다.
집을 떠나며 어쩌면 그 아이는 왜 하필 내가 가야해 하며 집 앞을 서성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이제는 어머니가 돼 버린 숙모의 서릿발 선 엄포에 그 집 앞을 서성거릴 일은 없었을게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이 되었다.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쉽사리 짐작되지 않는다.
하지만 맺은 연의 무게를 알 수 있는 몇가지 일들은 있다.
그 아들은 또 아들을 낳았다. 그러고는 곧 전쟁이 났다.
피난길에 가족들은 공습을 겪었고 손주를 지키려 감싸안은 채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목숨을 버렸다.
우리안에는 이런 얘기들이 있다.
당신안에는 없다고? 그러지마라.
시간을 압축하듯 지내온 우리네 속엔 지금은 상상도 못할 것 같은 삶의 질곡들이 쌓여있다.
먼 이국의 허삼관이 낯설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매혈이란 살아남기 위해 그 그리고 우리가 해야만 했던 모든 행위의 총칭이다.
어떤이는 자기의 청춘을 팔았고 또 어떤이는 마음을 팔았다.
살기위해서.
옛날일로 치부하며 마치 늙은이의 타박처럼 듣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삶의 본질이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형태만이 변할 뿐이다.
그래서 통속적이기도하다.
통속!! 통속!!하며 무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그 통속적인 얘기에 우린 늘 눈시울이 붉어지고 또 때론 헤헤 거리며 웃으니까.
피판돈이어서 땀으로 번돈과는 틀리다며 장가가는 허삼관.
자라대가리 노릇하며 국수 먹이러 일락일 업고 가는 허삼관.
시절이 뒤숭숭하여 아내를 아들놈들이 비판하는 판에 자기도 같은놈이라며 아내편을 드는 허삼관.
난 그 통속이 좋다.
소설의 가장 큰 힘은 어찌되었든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로써 허삼관의 삶은 보는 이의 공감을 얻는다.
하지만 매력적인 문체 역시 빠질수 없다.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게 구성진 한판 마당놀이같은 작가의 화법이 큰 역할을 한다.
조금은 희화화된 모습의 허삼관을 따라가다보면 조금은 거북스레 느껴질 그의 고통도 받아들일 여유가 생긴다.
가끔은 다행이다하며 속으로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애이불비 그 묘한 경계에 작가가 드리워 놓은 가락을 따라가는 허삼관의 매혈 여정.
난 이제 가끔씩 내가 아는 그 누군가에게서 삼관옹의 모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