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lousy

몰락의 에티카
국내도서>비소설/문학론
저자 : 신형철
출판 : 문학동네 200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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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에 대한 질투.

부럽다. 그의 글이.
마냥 부러워만 하다 말테지만.
굳이 질투를 느낄만한 뭣도 없지만.


출처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씨네21 인터뷰)


몰락이 주는 고차원적 전율과 감동



-지난해 12월 펴낸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이야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책의 도입부를 읽어보면 문학을 세계를 충격하고 타격하는 충차나 투석기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 같은데요.

=문학에 한정할 수는 없는 예술의 기능이죠. 다만 활자가 그것을 가장 심도있게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어는 다른 예술이 쓰는 매체보다 능력이 많다고 봐요. 특히 깊이 들어가는 데에 유용해요. 아무리 연기 잘하는 배우가 한순간의 느낌을 표정으로 드러낸다고 해도 최고의 문장가가 같은 내용을 반 페이지의 글로 쓴 것을 능가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제목의 ‘에티카’라는 말을 선택하면서‘윤리’라는 말의 정확한 내포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도덕과 혼동되지 않도록 한다든지.

=누가 현재의 제게 문학이 뭐냐고 물으면 돌려줄 수 있는 대답이 거기 들어 있죠. 예를 들어 누가 봐도 법적으로 범죄자고 경제적으로 금치산자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인 한 사람이 있다고 쳐요. 세상의 어떤 판단 기준으로도 그를 구원할 수 없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맥락이 있을 테지요. 그 불가피함이 우리에게 중요한 진실 하나를 줄 텐데 그럼 누가 이 진실을 보존하고 구원해낼 수 있을까. 그게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한 인간이 실패를 뻔히 예감하면서 어떤 길을 걸어간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가‘윤리적인’인간임을 문학이 설명해줄 수 있다면 위대한 일이 아닌가 싶은 거죠. 오이디푸스도 그런 인물이고 성경도 전 그렇게 읽었어요. 행간에 예수의 고뇌가 슬쩍 드러나는 순간이 있어요. 병사에게 끌려가는 순간에 한 제자가 칼을 꺼내니 예수가 만류하며 “내가 지금 당장 아버지께 얘기하면 열두 군단의 천사들이 나를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러나 그리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죽어 세상을 구원한다는 예언이 실현되겠냐”라고 하죠. 전율이 오는 대목이에요. 예수라는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메시아가 온다”는 구약의 서사가 있었어요. 한낱 목수의 아들이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서사 안으로 들어가 죽음이라는 결말까지 뚜벅뚜벅 걸어가서 이야기를 종결지은 거예요. 그런 몰락이 문학이 줄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전율이고 감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몰락하는 자에 대한 매혹이 평론집의 출발점인데요. 김영하와 박민규의 소설에 대한 평론에서 같은 몰락이라도 차이가 있음을 말하셨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빛의 제국>에 나타난 문제 해결책은 쉽게 현실에 투항한 것이고 박민규 작가의 <핑퐁>이 선택한 결말은 초현실로의 쉬운 투항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몰락 가운데 무엇이 투항이고 무엇이 윤리적 몰락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다고 보세요?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봐요. 인물이 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지점까지 걸어가서 “저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지점에서 몰락을 선택해 사람들을 흔들어놓는 상황이 있죠. 예를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그랬죠. 우리 사고 안에는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좌표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 좌표가 흔들리게 되고 그때 윤리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 이 윤리는 정치·사회·문화적인 것을 근저에서 흔드는 근본적인 것이죠.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서 남파 고정간첩이 남한의 간첩으로 거듭나는 장면은 매끄러운 결말이고 역시 잘 쓰는구나 싶지만 전율을 주지 않거든요. 작가는 그것이 현실적이라는 입장일 테지만요.


-그동안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명제를 두고 비평계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몰락의 에티카>에서 신형철 평론가께서는 종언이라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며 김중혁, 김애란의 소설도 잘 쓰여진 근대소설로 볼 수 있다고 쓰셨어요. 근대문학의 개념이 서로 다르지 않았나요?

=사실 근대소설의 개념은 규정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에요. 가라타니 고진은 난 이것을 근대소설로 본다고 전제하고 이런 문학이 없으니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논법을 구사한 거잖아요? 근대문학의 개념에 동의해야 종언에도 동의할 수 있는데 저의 근대문학 개념은 처음부터 달랐어요. 거기서 가라타니의 주장의 핵심은 오늘날 문학이 사소해지고 힘이 없어졌다는 건데요. 그건 골방에서 혼자 문필가로 살 게 아니라면- 전 사실 그러고 싶지만(웃음)- 제쳐둘 문제는 아니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대답해야 할 난제인데, 저는 문학의 정치적 영향력은 확실히 덜해졌을지 몰라도 문학에서만 얻는 근원적 흔들림, 윤리적인 영향은 없어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가라타니의 주장은 어느 순간에 이르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애정과 신념의 문제 같아요.


-<몰락의 에티카>에 실린 글 가운데 영화에 관한 평이 딱 한편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누아르>라는 제목의 <올드보이> 분석인데요. 쓰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텍스트가 분석틀과 정합되어서 쓰게 된 글인가요? 영화에 관한 글이 한편뿐인데 책에 포함시킨 이유도 궁금합니다.

=저는 인간의 무의식, 운명, 죽음과의 대결을 모티브로 하는 그리스 비극이 문학의 본적지 같은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올드보이>를 보고는 그리스 비극의 재연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좋은 예술의 힘을 잘 보여준다고 봤고요. 그런데 마침 <계간 영화언어>로부터 글을 청탁받아서 쓰게 되었죠. 제가 영화평론을 썼다기보다 영화의 서사를 평했다고 생각해요. 영화에 관한 글이지만 저의 문학론과 관련있다고 판단해서 목차에 포함시켰고요.


-<올드보이>처럼 분석틀에 딱 맞아떨어지는 텍스트를 보면 거꾸로 비평적 해석으로부터 출발해 창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창작이란 본래 에너지만 갖고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랭보는 10대 후반에 시를 썼잖아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큰 예술가가 되려면 자기 안에 비평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성경과 대결해 <최후의 유혹>을 썼고 박찬욱 감독이 <오이디푸스>를 읽고 <올드보이>를 만든 것처럼 위대한 텍스트들과 싸우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비평적 투쟁을 통해서 예술가로서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우리 문학계를 보면 역사적으로 축적된 문제들과 맞서보려는 야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김연수 작가가 뛰어난 면이 있죠.


-비평가란 ‘걸작’이나 ‘쓰레기’같은 표현을 비장하고 있다가 쓸 기회를 노리는 존재라고 쓰셨습니다만, 정작 본인은 그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평론가처럼 보여요.

=긍정적인 극단적 표현은 가끔 써요. 절제를 못해서 핀잔을 듣는 쪽이죠. 좋은 걸 보면 참지 못해 흥분하는 성정이거든요. 등단 전에 제가 비평을 한 장소는 술집이에요. (웃음) 어떤 작품이 너무 좋을 때면 참지 못해서 술 먹자고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는 “이거 죽인다”고 떠들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좋은 걸 좋다고 말하고 싶은, 그것도 다른 사람은 흉내 못 내는 말로 좋다고 말하고 싶은 욕구가 제가 비평을 하는 원동력이에요.


-흔히 비평가는 창작자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비평하는 사람만의 은밀한 즐거움이 있다면 뭘까요?

=저는 창작과 비평의 차이보다는 동질성을 크게 느껴요. 비평가 역시 문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창작에 대한 콤플렉스도 없고요. 비평가로서 제가 느끼는 행복감은 창작자들도 다들 느낄 만한 것들이에요. 글을 마친 성취감, 독자와 소통하는 즐거움, 드물게는 내가 썼지만 다시 봐도 괜찮다 싶은 글이 있을 때의 기쁨이죠. 어디선가 봤는데, 작가 성석제 선생이 어느 날 심심해 책을 한권 집어들고 재밌게 한참을 읽었는데 표지를 보니 당신이 쓰신 책이었다나요? (웃음) 그런 즐거움은 글쓰는 사람이라면 다 갖고 있을 거예요.


-예술사를 서술하는 작업이 비평가의 최종적 목표 중에 있다고 보십니까?

=자신의 취향이 한 역사서술의 근거가 될 만큼 탄탄하고 설득력이 생겼을 때 시도할 수 있겠죠. 역사서술이라는 것은 일종의 판결이기 때문에 그전까지 검사, 변호사 노릇을 해야죠. 어떤 작가를 밀어보기도 하고 증거를 찾아보기도 하는 모험을 충실히 하면 나중에 문학사를 쓸 수 있을 거라고 봐요.


-문학 수업을 하고 비평가로 일한 시간 동안 좋은 문장에 대한 생각이 변했습니까?

=과거에 쓴 문장을 보면 불과 2, 3년 전 것이라도 낯설고 민망해요. 지금은 내가 느낌을 정확하게 문장으로 포착했다면 그 문장은 분명 명쾌하고 아름답고 쉬울 것이라고 믿어요. 짜릿한 문장은 묘사를 잘해 아름다운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 세계의 비밀을 정확하게 잡아내서 도저히 다른 문장으로 바꿀 수 없겠다 싶은 문장들이에요.


창작과 비평의 차이보다는 동질성 느껴


-비평가 조영일 씨는 평론집 <한국문학과 그 적들>에서 “비판은 칭찬보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기존 평단의) 생각은 문학의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입장에서 나온 이데올로기라고 썼습니다. 또, 평론가들은 호평을 통해 기존 시스템에 끼어들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썼고요. 여기에 직접 대응하는 반론을 쓰신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저는 한 비평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글의 모델을 두고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한국 문단이라는 제도적 시스템이 미치는 영향이 실제로는 그리 크지 않다고 봐요. 또 지금은 문예지 사이의 색깔 차이가 크지 않고 모든 잡지와 문학 동인이 찾는 것은‘좋은 작품’이에요. 창비에서 신경숙의 책을 내고 문학동네에서 황석영을 내죠. 거기엔 물론 상업적 판단이 개입돼 있겠죠. 그런데 이것은 출판비평이 관여할 영역인 것 같아요. 전 조영일 형이 문단 제도에 대한 사회학적 비평을 하고 있다고 보거든요. 그 형이 제기하는 논점은 “한국 문단에 이런 문제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고 저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거죠. 조영일 형이 “소설가의 소원은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다. 비평가의 소원은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일까?”라는 일본 비평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문장에서 자유로운 한국 비평가가 어디 있겠냐고 물은 글이 있어요. 그 질문이라면 정말 대답할 수 있어요. 제 소원은 좋은 비평을 쓰는 거라고요. 비평가의 권한이 있다면 문예지 편집위원하면서 필자를 선택하고 내 글을 문예지 지면에 쓸 수 있다는 정도인데 그게 권력인지 정리하는 역할인지는 모르겠어요. 비평가가 좋지 않은 작품을 좋은 작품으로 둔갑시키고 훌륭한 작가를 소외시킬 힘은 없다고 봐요.


-제가 읽은 신형철 평론가님의 글 가운데 비판적 시선이 두드러졌던 평을 꼽자면 창비시선 300호 기념시집과 고은 시인의 <허공>에 관한 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반응이 있었나요?

=창비에선 조금 길게 써서 잡지에 실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치적 진보와 미학적 보수성이 결합된 한국 특유의 분위기에 관한 글이 될 텐데, 오래전부터 가졌던 문제의식이라 쓰기로 했어요. 고은 선생의 경우 기본적으로 훌륭한 시인이라는 믿음이 있지만 그 정도 확고한 위치에 계신 분이면 칭찬을 더 얹기보다 비판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쓴 것입니다.


-비평 대상이 되는 글의 문체나 모티브를 아예 평문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영화 기사를 쓰면서 MTV 스타일의 영화에 대해서는 랩 같은 리뷰를, 우아한 시대극은 고풍스러운 문장으로 쓰면서 ‘어울려 놀고’싶은 때가 있긴 해요.

=텍스트에 전염되어 쓰는 경우죠. 특히 문장에 매혹돼버리면 자연스럽게 흉내를 내게 돼요. 예를 들어 이병률 시집을 해설한 글은, 시인의 문장이 찰랑찰랑하는 물 위에 떠 있는 느낌이어서 저 역시 물 위에서 노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라는 제도가 아니라 시적인 것 자체라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문학 다음으로는 음악을 사랑하는데, 노랫말은 어떻게 읽으세요?

=너무 시처럼 쓰려고 한 가사는 도리어 매력이 없어요. 대중가요는 1차적으로 무슨 단어인지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기본 상용어휘로 작사를 해야 하니까 시보다 훨씬 제약이 많죠.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대중가요 문법 안에서 최대한 끄집어낸 노랫말들이에요. 이소라 씨의 가사를 좋아해요. 평이한 말을 엮었는데 그 안에 무엇인가 깊은 것이 고이고 갑자기 그 단어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진정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위적으로 말을 뒤틀어야만 시가 된다는 편견을 깨는 데에는 이런 노랫말들이 참 유용해요.


출처 : 
김혜리가 만난 사람 (씨네21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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